풍경과 사람 형태

안소연 미술비평가


  이지은은 최근까지 특유의 흐릿한 파스텔 톤의 도시 풍경을 주로 그려왔는데, 뿌옇고 낮은 채도로 인해 화면 전체가 음소거 된 것 같은 청각적 착시를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특히 서울의 광장을 비롯해 고궁과 근대 건축부터 여러 시간의 층이 두텁게 쌓인 도시 풍경을 매우 원거리에서 조망하듯 바라보는 시점의 화면을 구성하곤 했는데, 전체적인 적막감이 마치 물 속이나 어떤 진공 상태를 떠올릴 만큼 일상의 모든 소음과 소란이 제거된 비현실적인 순간을 연상시켰다. 그것은 아마도 그림 속의 풍경과 사람의 형태가 극단적으로 대비를 이루면서 조성된 긴장 때문일 수도 있다. 예컨대, 그가 건축물이나 광장 같은 평평한 지면을 추상적이고 거대한 배경처럼 그림 속에 끌어들였다면, 그 앞에서 각각의 일상적인 순간을 지나가고 있는 사람들은 “개미만큼” 작게 표현되어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푸른 광장>(2021)이나 <무교동의 여름>(2021)을 비롯해 <일민>(2018) 같은 그림들은 배경으로 자리잡은 광장과 고층 빌딩에 비해 그 앞의 사람들은 움직임 마저 거의 제거된 것처럼 보일 만큼 미미한 크기로 그려져 있다. 이는 그림 전체를 구성하는 수직 수평의 절대적인 균형과 묘하게 조형적인 작용을 이루면서 적막감과 긴장감을 동시에 조성해 놓는다. 물론 이 무렵 이지은의 회화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원거리 풍경 속에 사람들의 표정이나 움직임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색면 형태 정도로만 표현한 특징이 더 강조되어 있고, 어떤 것은 그런 구성 안에서 굉장히 시적인 상상력을 환기시키기도 한다. <도시, 평야, 산>(2020)이나 <Wet Square>(2020)을 그러한 예로 들 수 있을 텐데, 하나는 녹색 방수 도료가 칠해진 건물의 옥상을 급격한 기울기로 화면 안에 들여 놓고 먼 풍경과 수평으로 만나는 독특한 구성을 보여준다. 삶의 진부함이 펼쳐진 풍경에서 채도를 낮추고 널브러져 있는 기물들을 색면 정도로만 다루는 가운데 일상의 민낯은 잠시 시적인 상상 속에서 해방되는 인상을 준다. <Wet Square>는 훨씬 구체적으로 일상의 사건을 그림 안으로 가져오는데, 광장의 시위대와 경찰이 대치하는 상황에서 사람들의 표정을 지우고 빗속 풍경의 시야를 더욱 흐릿하게 왜곡시킴으로써 이 그림은 현실의 서사 대신 현실의 은유로서 조형적 순간과 맞닥뜨리게 된다.

  이렇듯 최근까지 진행했던 그의 도시 풍경 작업은 어떤 점에서는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와 같은 초현실주의자들이 현실을 변형시켜 표현했던 것처럼 극단적으로 확대해 놓은 배경 공간 속에 사건으로부터 소외된 사람의 형상을 결합시켜 놓음으로써, 일상의 순간이 잠시 현실을 이탈해 버린 것 같은 긴장을 느끼게 된다. 그러던 가운데, ‘백 개의 서울’ 시리즈를 계획하여 진행한 작업은 그러한 긴장감에서 벗어나 도시 풍경 속에서 포착된 미적 순간을 그럴듯한 색면 추상의 효과로 재해석하여 표현한 특징을 볼 수 있다. <을지로의 여름밤>(2022)이나 <당현천의 오월>(2022) 같은 그림은 노을과 그림자를 이용해 일상의 시공간이 색채의 관계 속에서 폭발적인 변환을 드러내는 순간에 대해 회화적 화면 구성을 강조해 색면의 재배열로 풀어낸 셈이다.

  한편, 가장 최근에 그가 몰두하고 있는 작업은 ‘In the midst of life’ 연작으로, 도시 혹은 서울 풍경이라는 제한적인 설정에서 그의 삶의 주변이라는 일상적 풍경으로 옮겨진 양상을 드러낸다. 그것은 아마도 자신의 삶의 자연스러운 변화가 반영되기도 하면서 구체적인 장소 보다는 진부할 정도로 평범한 순간에 대한 “시선”에 초점을 맞춰 회화적 순간으로의 전환을 꾀하려 했던 게 아닐까 싶다.

  <사모바위>(2023)이나 <계절의 찰나>(2023)를 보면, 기존의 도시 풍경을 그리던 이지은의 시점을 다시 한 번 엿볼 수 있는데 배경과 인물의 극단적인 스케일 대비가 여기서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여전히 인물의 표정이나 구체적인 움직임을 드러내지 않은 채, 풍경과 관계 맺는 사람의 형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반면 도시 풍경에서는 어떤 구체적인 사회적 사건들이 흐릿한 화면 밑에 봉인된 채 공존하고 있었다면, ‘In the midst of life’ 연작에서는 조금의 서사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다. 그는 되레 저 풍경과 사람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그 형태의 찰나적 순간을 긴 회화적 시간 속에 이입시켜 붓질과 제스처로 매만지는 화면의 특징을 제시한다. <사모바위>를 보면, 위태롭게 정상에 서 있는 거대한 바위와 그 옆에 나란히 몸을 구부리고 서 있는 사람 형태의 닮음 속에서, 작가는 바위의 크기와 무게를 표현할 붓질과 함께 작고 흐릿한 사람 형태의 윤곽선을 평평한 색면에 담아낸다.

  <생의 한가운데>(2023)은 초록에서 분홍으로 서서히 물들어 가는 시간의 흐름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면서, 물과 땅, 사람과 자연, 삶과 죽음 등의 대비적인 영역을 화면 속에 지속하는 흐름으로 표현했다. 할머니들이 입고 있는 옷의 색이 화단에 만개한 꽃과 중첩되면서, 색의 연쇄적인 흐름으로 그가 관찰하고 있는 일상의 순간에 축적된 시공간의 두께를 환기시킨다. <여름 손님>(2023) 또한 그가 무심히 보게 된 여름 태풍 속의 한 장면이었을 텐데, 그는 바다를 건너온 바람과 땅에 뿌리를 두고 오랜 세월 살아가고 있는 무성한 나무와 그 앞을 지나가는 한 사람의 순간이 겹쳐지는 일상의 마술같은 시간을 포착하여, 그 모든 것이 공존하는 순간에 대한 이미지를 붓질과 색의 배열로 표현한다. 이지은은 원거리의 풍경, 어쩌면 거대한 일상의 시공간 속에서 하나의 색면에 불과할지도 모를 사람의 형태를 포착해 그 둘 사이의 관계를 회화적으로 접근하려고 하는 것 같다. 이는 매일매일의 성실한 드로잉과 일상에서 길어 올린 순간에 대한 단상을 기록하며 회화적 관계 안에서 재구성될 순간을 궁리하는 작가의 태도로 드러난다.




물구나무서기

오주현 미술비평가


  캔버스 안 희미한 풍경 속 레이어(역사적/사회적)가 쌓여있는 공간, 시간의 축적이 고스란히 보여지는 땅이나 건물들을 배경으로 사람들이 보인다. 일상의 평온함 속, 익숙했던 배경들의 이야기와 다양한 사람들의 삶 그리고 구성들은 익숙한 풍경을 생경하게 뒤집어 놓는다.

  저마다 각기 다른 경험과 기억들은 축적되어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내고, 여러 감정들이 뒤섞인 익숙한 풍경은 낯설기도 하고 꿈처럼 희미하게 보이며, 특별한 이야기를 갖게 된다. 시간을 두고 캔버스에 여러 차례 칠하는 방식으로 이 같은 이미지를 구축하는 것은 단순히 회화의 방법론 적인 것에서 벗어나 무형의 것들이 물리적 공간에 스며드는 일종의 ‘쌓여지는 다양한 감정과 시간‘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미지의 순간성에서 벗어나 간접적으로 지나온 시간과 과정들을 느낄 수 있다.

  작가의 이전 작업에서 보여지는 서울 도심의 ‘광장’ 시리즈는 특수한 장소와 밀집된 군중을
주로 그려내고 있다. 작가가 주목한 광장이라는 장소성은 특성상 ‘비워짐’과 ‘채워짐’이 함께 필연적으로 공존해야 존속이 가능한 장소이며, 군중 역시 같은 의미에서 광장이라는 장소가 채워지는 상태를 표현하는 하나의 요소라고 볼 수 있다. 허나 역설적으로 채워지기 위한 군집된 익명의 군중들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유추할 수 있었다.

제가 그린 광장 공간에 전경들이 굉장히 많은데 그들의 정체성이 재밌었어요. 광장의 공간에 가장 많이 상주하지만 이 공간의 주인은 아닌 사람들. 음.. 뭔가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는 사람들. 그런 익명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화려한 형광색의 옷을 입고 본인의 의지와는 다르게 의무적으로 애정이 없는 장소에 서 있는.. 그래서 존재감 자체가 약하다는 생각을 했었죠.  
이지은

그럼 그 전경들을 통해서 본인을 투영 시킨 것 일수도 아님 단순히 그들을 보며 상황에 위로를 받았던 걸수도 있겠네요.

오주현

  작가가 그려내는 광장 안 의 군중은 어쩌면 익명의 타자들이 아닌 단일한 주체(이를테면 작가 자신)로 곧게 설 수 없는 당시의 상황에서 정체성을 찾아내는 과정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최근 작업으로 돌아와서 작가가 그려내는 이미지는 군중의 비중이 줄어들고 도시풍경에 주목하고 있다. 군집된 사람들이 채워진 특수한 목적성을 가진 광장에서 벗어나 일상적인 공간에서 어떠한 의미를 찾고 있는 것인지 물었다.

몇 년 동안 ‘광장’이나 ‘경찰’이라는 특수한 장소와 인물 군을 많이 그리다 보니, 스스로 작업을 하는 데 있어서 새로운 환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주제적으로 조금 더 부드럽게 접근하며 회화적으로도 손을 풀고 싶어서 보다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풍경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일상적인 풍경 모두에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장소 자체에 시간의 레이어가 많이 쌓여있는 공간이라든가 그 공간에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 특유의 정서가 묻어나는 공간에 관심이 있어요. 삶의 이야기와 정서와 같은 무형적인 레이어들이 쌓여 장소 특유의 분위기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하기에. 그러한 공간과 인간의 유기적인 관계를 보여주는 장면을 한 화면에서 총체적으로 느낄 수 있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이지은


  이처럼 작가는 이전에 말하던 특수적 장소성에서 벗어나 장소에 속해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더 나아가 목적 없는 일상적인 풍경으로 스스로의 더 내밀하고 주관적인 접근을 통해 도시에서 유의미한 무형적 레이어들을 찾아가고 있는 과정에 있다.

  또한 기존의 작업의 연장선에서 공간과 인간의 유기적인 관계를 탐구하며 더욱 구체적인 연구를 통해 도출하는 이미지들을 찾아가고 있으며, 더불어 도시 안의 자연을 작가 본인만의 시각으로 새로운 인식의 지점을 제공하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도시공간이라는 거대하고 유동적인 환경 속에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과정 속에서 작가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고 소통하는 방식이 어떠한 새로운 방법론을 가져올 수 있을지 지켜보는 것은 충분히 유의미한 일일 것이다.